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던 영영이 감국 차 두 잔을 챙기고는 혜미를 가게에서 나오게 한 후, 가게 문을 잠갔다.
“자, 받아요.”
혜미는 영영이 건넨 따뜻한 찻잔을 받아들고서 의아해 하며 물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가보면 알아요.”
영영이 모든 전등의 스위치를 켠 후, 건물의 계단으로 올라가자 혜미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 올라갔고, 마지막 층에 다다르자 닫혀있지 않은 문을 통해 둘 다 옥상으로 나왔다.
“설명이라도 좀 해주든가, 여긴 왜 올라온 거예요?”
그녀의 말에 영영이 손을 들어 위를 가리키자, 그 위에는 검푸른 밤하늘과 어두운 구름 몇 조각, 그리고 별들과 달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혜미의 눈에 비쳤다.
“와, 멋진데요?”
“여기가 풍경이 좋거든요, 분위기도 그렇고.”
그들은 차를 마시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의외로 별이 많네요.”
“그러게요.”
그녀가 웃으며 영영에게 다가오자 영영은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우리 솔직하게 대화나 나누고 싶어서요.”
혜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라... 저기요, 아저씨. 때로는 솔직하지 않은 게 서로 간 사이에 더 좋을 수도 있어요.”
“고마워요, 도와줘서.”
영영은 자신의 말에 놀라는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7, 8월에 무리를 해서 손해를 많이 입었던 것도 그렇고, 손익분기를 겨우겨우 맞춰서 운영했었거든요. 재료 조달을 위한 자동차 기름 값을 포함해서 가스 비라든지 나갈 곳만 많고 들어오는게 적었으니까요. 그런데 그쪽은 생판 남인데도 헌신적으로 도와주니까, 처음에는 당돌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냥 고마울 뿐이에요. 뭔가 형용할 수 없는 큰 변화를 주었으니까.”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차를 한번 홀짝홀짝 마신 뒤, 대답했다.
“그쪽이 잘한 거죠. 내 충고를 받아줬고 내가 억지로 고친 것도 어찌됐던 받아 주셨으니까요, 사실 그만한 확신이 있으니 제가 그렇게 직접 나서서 한 거죠! 솔직히 말하자더니 이제야 제 공로를 인정하시네요?”
그가 대답대신 표정에서부터 짜증을 내며 반응하자, 혜미도 그에 대한 응답으로 살짝 웃었지만, 곧바로 슬픈 눈빛을 보이면서 말했다.
“뭐, 자판기 아저씨, 아니 영영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솔직한 대화를 원하신다니까 정말 솔직히 말해 볼까요? 하지만 감당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아플지도 몰라요.”
영영은 무슨 소리냐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쳐다봤지만 그녀는 그저 밤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아버지가 없으셨어요.”
“저도 없으셨어요."
영영이 무심결에 대답하고 몇 초 뒤, 그 뜻을 이해했는지 혜미가 먼저 물었다.
“사별하셨어요?”
“네.”
“전 이혼이셨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집을 나가시고 어머니와 저, 이 두 사람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살았죠. 친척의 도움은 기대할 것도 못 되고, 어머니가 살림을 다 챙기시느라 고생하시면서 저도 어머니를 도와드리려 노력했고 제가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되자마자 바로 일터로 나갔어요. 그때부터 값어치, 돈의 가치를 알았다고 해야겠죠. 할 수 있는 일이면, 액수가 더 크면 무식하게 어디든 무조건 다 나가봤으니까요. 그래서 공사장도 갔었을 때, 일이 서툴때는 다리쪽에 철근이나 폼, 합판에 박힌 못등에 지나가다 긁히거나 다쳐서 다 아물때까지 상처 안보이려고 평상시에 검정스타킹만 신고 다녔고. 또래 애들이 하이힐이나 굽 높은걸 신을때 저는 안전화 신고 공사장에서 여자라고 한소리 듣기는 했지만 뭔가 아주 힘쎄고 강한사람같은 느낌이 드는 게 자신을 위로해줘서 청소나 핀을 주우는 일, 자재정리든 눈치밥 먹으며 다 했어요. 목수 일도 알게 된 아저씨가 여학생이 이런 일 하는 것도 신기한데 기술 한번 배워보라고 알려줘서 그때 배웠구요. 또 다른 뭐 할 만한 일들은 카페나 식당 서빙도 해보고 분식집에서도 일해보고 공장도 가봤고 주유소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학비 벌라, 생활비 벌라.”
영영은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차만 들이켰다.
“ 정말 주변 시선은 좋지 못하더라고요. 실은 바깥이 어떻든 꿋꿋이 자기 할일하는 힘쎄고 강한 모습과 더불어서 보수를 고려해 일을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아주 힘들었고 일하느라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공부도 해야하고 여러 가지 스트레스도 이겨내야 하니 체력도 한계가 오고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지더라고요. 죽은건지 산건지 모를 좀비처럼요. 정말 저도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어떻게 악착같이 버텼는지 참, 그저 좀 가난하고 이혼한 가정의 자녀라는 꼬리표를 붙였을 뿐인데 항상 돈을 희망으로 삼고 편견과 가난, 냉소한 시선, 두려움과 싸워야 했죠. 한푼이라도 벌어서 살림이랑 학비에 보태며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서 저도 좀 더 벌고, 좀 더 공부하고 국립대로 가긴 했는데, 난 그러면 좀 더 나아질줄 알았는데, 그래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사는 게 힘든 걸 포함해 여전히 힘든 건 달라진 게 없네요.”
조심스럽게 영영이 그녀를 쳐다보자 그토록 모질었던 현실과 싸워왔고 싸우고 있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제가 좀 명랑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보이시겠지만, 하아, 씨.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사람들이 제가 처한 환경이나 사정을 알게 되면 저의 모습보다 그 부분을 먼저 중요하게 봐 버리니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이건 지나간 흔적들일 뿐이고 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걸 어필하려면 상대가 다가오기 쉽게 억지라도 밝고 적극적이면서 때로는 남이 믿을 수 있게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이 돼야 했으니까요. 그래야 도움이든 일이든 친구든 생기니까.. 그래서인지 어쩌면 그런 내적인 압박 때문에 과대를 포함해 스스로 항상 힘든 걸 다 떠맡았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힘들면 내려 놓을수도 있었을텐데 저에겐 마음고생으로 아플 겨를조차 노력해야 할 시간에 비하면 사치였거든요. 힘들다 하소연할 곳도 스승이나 친구들은 경험상 아무래도 무리고 엄마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엄마와 나 둘 다 겨우 버티는데 무너질까봐 입 밖으로 함부로 꺼내지도 못했고요. 그렇다고 이런 책임감도 없으면 더 이상 앞으로 갈수 없을 정도로 아주 주저 앉아버릴 거 같구요. 흐읍, 제가 지금 말이죠. 참상이 어떻냐면요. 지금도 그렇지만 힘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이 악물고 노력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잘 되겠지, 잘 되겠지 하며 미래에서 맞이할 행복을 위해 이걸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든 과거가 그랬고 지금도 힘드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힘들어도 버티면서 살려고. 그리고 그걸 어떻게든 해내는 난 강하다고 믿으면서..”
그녀는 살짝 떨면서 감정이 격양되었는지 찻잔에서 나오는 김에 한숨을 한번 길게 쉬고 말했다.
“어때요? 조금 충격적이죠? 이런 사실 알고 있는 애들 거의 안 돼요. 그만큼 이해해줄만한 애들도 거의 없어요. 그저 돈과 학점에 미친 독한 선배로 보일 뿐이겠죠.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것도 사정상 접었고 많이 힘들고 지치지만, 네. 이젠 진짜 괜찮아요. 하지만 어쩌면 그전처럼 괜찮아져야 하는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지만... 항상 흘리는 땀처럼 너무 눈물도 많이 흘려서 그런지 ‘내 인생은 그런가 보다’하고 마음이 무덤덤해져서 웬만한 큰 일이 아니면 나오지도 않으니까요.”
영영은 혜미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가게가 헤미의 손에 의해 바뀌어가던 것을 회상하면서 그녀의 그림들, 그라인더로 갈아냈던 인테리어 소품등 하나하나가 그녀가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흔적들로서 어떻게든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푹 숙였다.
영영이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고서 차를 한 모금 마신 혜미가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최대한 솔직히 말해봤어요. 아저씨 가게 손대게 된 것은 그냥 마음이 끌려서 그런 거지 아무런 사적 의도는 없었고요. 그냥.... 들어줘서 고마워요.”
영영은 고민했다. 무심코 시작한 대화가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게 된 것은 제쳐놓고 그녀가 털어놓은 솔직하고도 아픈 사실에 대하여 단순히 위로의 말을 꺼낼 수도 있었지만, 자신을 믿고있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도 솔직하게 말해야 할 부분이 마음속에서 올라오고 있었으나 도저히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밤의 어두움 속에서 달빛을 받은 감국차는 영영의 손과 함께 흔들리면서 그런 그의 흔들리는 잔상을 수면 위에 그대로 비춰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꺼낸 것을 고려하여 정말 억지로 그동안 감추려고 했던 마음을 힘들게 억누르며 말했다.
“있잖아요. 사실은.”
혜미가 그를 바라보자 영영이 떨리는 마음을 겨우겨우 가라앉히며 말했다.
“전통 차 카페를 창업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어요.”
무슨 말이냐는 그녀의 표정을 본 그는 한숨을 한 번 길게 쉰 후 말했다.
“저는 어릴 때 바리스타에 대한 꿈을 가졌고 집안이 반대를 하자 집을 나와 일을 하면서 꾸준한 독학 끝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자리를 잡으면서 꾸준히 실력을 쌓아 나갔었죠.”
“그런데요?”
그녀의 말에 영영은 손과 같이 떨리는 컵 안의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KBC라는 대회가 있어요. 한국 바리스타 챔피언 쉽이라는 대회에서 제 실력을 입증해 보이겠다고 매년 참가했었는데, 우승, 준우승은 한 번도 못 해보고 입상에 그쳤죠. 그 대회에 우승한 후,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이라는 국제대회도 나가보고 싶은 꿈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주변에서는 입상으로도 잘한 거다. 아직 젊으니까 괜찮다고 했지만 전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군대를 갔다 온 후,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영영은 다시 길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차라리 아직 인지도와 사람이 밀집하지 않은 블루오션으로, 즉 내가 최고로 자리 잡을 수 있게 새로 시작하자는 생각으로 한방차 쪽을 연구했죠. 어쩌면 지금까지의 나에 대한 변절이자 배신이기도 했어요. 어머니한테는 바리스타가 되겠다고 집을 나갔었고 주변 사람들도 바리스타라는 직업에 대한 저의 자존심과 열정을 알았거든요. 하지만 실력이 부족한 채로 커피를 계속 만든다는 것이 저는 탐탁치도, 내 자신이 허락하지도 않았어요. 이상이 현실에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그래서 좀 더 나에게 가능성이기도 했던 한방차를 치밀하게 연구하고 전국을 다니며 공부한 후, 창업하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해왔던 것처럼 전통차 문화계승이라는 꽤 그럴듯한 명분을 강조하면서요.”
혜미는 영영의 흐느끼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아무에게도 밝히지 못했겠네요.”
영영이 혜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동안의 노력과 열정을 생각하면 그런 제 자신이 부끄러워 차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어머니도 아직 바리스타 하는 줄 아시니까요. 하지만 개업한 당일 이후에 한방차카페인 이 가게를 운영했을 때의 마음은 마치 환골탈태하듯 정말 진심이었어요. 더는 열등감에 치우치지 않고 더 이상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커피를 다룰 때처럼 정말 모든 열정을 다 쏟아 부었다고요.”
혜미는 영영을 쳐다본 후,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감아 음미해 본 뒤,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고 코를 한번 훌쩍 거린 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요.”
영영이 놀라자 그녀가 눈을 뜨며 말했다.
“우리 교수님이 그랬는데 상처는 저울질할 수 없데요. 큰 상처든 작은 상처든 상처는 상처라 당사자한테 고통을 주는 건 마찬가지라서 상처는 비교하지 말고 상처 자체로 인정하라고 했거든요. 저도 아무에게도 밝히지 못한 걸 영영 씨에게 밝혔고, 영영 씨는 저에게 밝히셨네요. 쌤쌤인걸요. 그동안 우린 살면서 ‘척’했던 거네요. 나는 세상이 억지로 주어서 나도 어떻게든 억지로 살려고 스스로 하게 된 척, 그쪽은 그쪽 스스로 만든 척이요.”
혜미는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 스마트 폰을 꺼내 뭔가를 검색하더니 북쪽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봐요.”
영영이 자신을 가리키는 별들을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조금 잘 안 보이긴 하지만 별들이 국자 모양인 걸 보아 작은곰자리 일거고요, 저 맨 끝 꼬리 쪽이 북극성이에요. 저기 끝에 있는 별이요.”
“네, 잘 보이네요.”
그가 북극성을 바라보자 혜미는 스마트 폰을 보며 말했다.
“빛은 1초에 30만 km의 속도를 내고, 빛의 속도로 지구에서 달까지 1.5초면 충분해요. 저기 있는 북극성에서 보낸 빛이 지구에 전해지려면 430년이 걸리게 된데요. 그러니까 저기 우리 눈에 보이는 북극성은 북극성이 임진왜란 쯤에 보낸 빛이라는 소리죠.”
영영이 그러냐는 듯 차를 몇 모금 마시자 혜미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이 별들도 지금 빛나는 척하고 있을 뿐인 거예요. 이 세상사는 모든 사람도 그렇고요. 하지만 있잖아요. 별이 빛을 열심히 내지 않았다면 430년이든 천 년이든 그 빛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요. 사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무리 척하고 있긴 해도 그 틀 안에서 열심히 살고 노력하면 세상 속에서 밝게 빛날 테니까요.”
혜미는 영영에게 더 다가가 속삭였다.
“어떤 척을 하고 있느냐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척이라도 세상을 얼마나 바르고 열심히 살아가려 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난 그래서 자판기 아저씨, 아니 영영 씨가 멋있고 좋아요.”
영영은 그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차가 몹시 따뜻하게 느껴졌고 덩달아 마음도 단단하게 박혀있던 응어리가 사그라진 듯 평온해졌다.
"나도 열심히 사는 혜미 씨가 멋있다고 생각해요. 가족이든 남의 가게든 다 책임지고 변화를 줄 만큼 만큼 능력있고 착한데다가 모습도 매력적이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잖아요. 내가 알아줄테니 힘들면 여기서 여유있게 차를 마시면서 옥죄는 마음의 짐들을 내려놓고 푹 쉬어 가도 되어요."
그의 말에 그녀는 멍하니 차에 비친 달을 쳐다보다가 다시 한바탕 울었고, 영영이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면서 잠시 시간이 흘러 진정이 되자 손수건과 거울을 꺼내 눈물을 닦고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 뒤, 바로 영영에게 평소처럼 새침하게 말했다.
"아까 제가 했던 영영 씨 멋있다고 했던 말 있잖아요."
"네. 그랬죠." 영영도 평소와 같은 태도로 대답했다.
“그랬죠라뇨! 피, 여기엔 고백하는 마음도 담은 건데. 그쪽 좋아한다고.”
혜미는 토라지듯이 고개를 돌리며 부끄러운 기색을 감췄다.
“네?”
“됐어요. 오늘따라 밤하늘이 참 예쁘네요. 차도 은은한 향이 참 달달하고, 또 분위기 있는 달의 저 노란 달빛도 차 색깔처럼 빛나고 있고요.”
“달이 보름달이라서 어두운 밤하늘에 유난히 더 밝아 보이는 거예요.”
그가 그녀의 말에 컵을 든 손을 들어 하늘의 달을 가리키다가 컵에 새겨진 다시가 눈에 들어왔다.
‘和人謝茶 화인사다 - 대각국사 의천
露苑春峰底事求 이슬 동산 봄 봉우리 아래 무슨 일을 할 것인가
煮茶烹月洗塵愁 꽃차 달이고 달빛 삼아 세상 근심 씻어낸다
身輕不後遊三洞 가벼워진 몸은 삼동 유람도 힘들지 않고
骨爽俄驚入九秋 상쾌한 골격 잠깐 사이 가을 구월 되었네
仙品更宜鍾梵上 선품[각주:1]인 차는 수행하는 절간에 어울리고
淸香偏許酒詩流 맑은 향기는 술 마시고 시 읊는 풍류까지도 허락 하네
靈丹誰見長生驗 누가 보았단 말이던가! 영단[각주:2]이 오래 살았다고
休向崑臺問事由 저승에 그 사유 묻지를 말게'
다시를 읽으며 멍하니 속으로 읊어보던 영영은 뭔가 더 느낀 듯, 개운해진 마음으로 천천히 차의 향을 음미하면서 달과 북극성이 있는 하늘을 다시 한 번 훑어보고 그녀를 확고하게 쳐다보았다.
“우리 둘 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하늘이 성의껏 칭찬해주나 봐요. 추운데 슬슬 내려가죠.”
밤하늘을 쳐다보는 혜미를 계속해서 바라보던 영영이 이번만큼은 용기를 내야겠다는 확고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 그럼 내려가기 전에 이때까지 척했고 앞으로 척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뤄갈 사람들끼리 북극성이 430년 후에 보게 될 모습 좀 연출해보죠?”
“무슨 소리에요?”
영영은 곧바로 혜미를 끌어당겨 기습 키스했고 혜미는 당황한 나머지 차를 놓쳐서 바닥에 떨어트린 후, 상황파악이 되자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편안하게 응했다.
그리고 키스가 끝나자 그녀는 영영을 밀어내면서 짜증을 부렸다.
“지금 뭐한 거예요.”
“내려가긴 갈 건데, 키스만 하고 갈 거라서.”
태연하게 말하는 영영의 미소 띤 표정을 읽은 혜미는 빈 찻잔을 들고 다소 과장되게 투덜거렸다.
“내가 못 살아! 자판기 아저씨, 차 떨어트렸잖아요. 신기하게 안 깨져서 다행이긴 한데, 아이 아까워서 이거 어째. 이런 건 차라도 내려놓게 먼저 양해 구하고 해야 할 거 아네요!!!”
“차, 그럼 더 만들어 줄게요. 우리 집에 차도 찻잔도 많아요. 아니지! 그냥 다과상을 대접해 드릴게요. 그러니 한 번 더하는 조건으로 흥정하죠.”
“어휴, 됐어요. 남자가 생각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에휴. 지금 이 작태도 북극성이 430년 후에 다 본다는 거 몰라요!”
“그럼 북극성이 우리가 행복하게 있는 모습을 430년 후에 보라고 보여주죠. 뭐.”
영영이 그렇게 말하고 혜미를 끌어당겨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사진을 찍듯 북극성을 향해 웃으며 포즈를 취하자 혜미는 당황했으나 이어지는 영영의 말을 듣고는 비로소 웃으면서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지금 순간만이라도 근심을 그 찻잔에 비워놓고 정말로 행복해져 봐요.”
그 말을 들은 그녀의 눈은 울먹이면서도 입은 미소를 짓다가 부끄러운지 영영에게서 재빨리 빠져나와 본심 없이 투덜거리며 문을 통해 나가려고 하였고 영영은 뒤쫓아 가며 말했다.
“지금 짜증내는 척하는 거잖아요. 나 다 알아요. 지금 무척 어색하거든요.”
“그거 한번 받아줬다고 다 아는 척하지 말아요! 자판기 아저씨.”
남은 차라도 마시려고 영영의 것을 빼앗아 입에 가져다 댄 혜미가 인상을 썼다.
“아, 아파. 혀 깨물었어요.”
그리곤 토라진 얼굴로 단호하게 영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너 고소!”
“아니 왜요?” 영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
혜미는 입맛을 한번 다신 뒤, 잔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차에서 피 맛나요!”
“그건 당신 거잖아!!!” 영영이 혜미의 어이 반 푼어치 없는 소리에 언성을 높였다.
“원래 당신 차잖아요!! 에이, 이거 아픈데. 내 헤모글로빈이 첨가된 차도 아깝고.”
“이리 와 봐요. 가게 구급함에 구내염약 있을 거예요.”
혜미가 한결 밝아진 낯빛을 비추며 영영을 쳐다보고 영영은 혜미를 끌어 앉고 웃으면서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남은 차를 마시려다가 자신을 그동안 고민에 빠트렸던 ‘차(茶), 첫맛은 쓰나 끝 맛은 달다.’라는 문구가 머릿속에서 떠올라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비로소 자신만의 의미로 이해한 영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은 후, 재빨리 혜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밤중엔 세상이 흉흉해서 여대생은 많이 위험하니까 같이 의지해서 내려갑시다.”
"네, 네. 뭐 그러세요. 그렇게 흉흉하면 저보다 돈 많은 가게의 남자 주인이 더 위험할 것 같지만."
혜미의 말에 영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서로 웃고나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내 입술도 의지해야 할 대상이 필요한 거 같아요.”
그 말에 혜미가 피식 웃고 영영도 자기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와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돌려 웃으려던 그 순간, 자신을 껴안고 끌어당긴 혜미와의 깊고도 오랜 키스가 그를 맞이했다.
건물에 어둠이 깊게 깔리고 살을 아리는 차디찬 밤이 깊어갈수록 그 둘의 마음과 관계도 그들이 들었던 차(茶)처럼 따뜻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