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눈바람이 휘몰아치던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러 2월이 되자, 영영은 알바생을 시켜 많이 늘어난 손님들을 맞이하게 하도록 시키고 사업상 중요한 분들과 대화를 마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가게 안은 어르신들이 차의 향을 즐기거나 아주머니들이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한방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어린아이들이 앉아서 혜미가 사왔었던 늑대 인형과 사슴 인형, 곰 인형 등 동물 인형들을 만지고 던지면서 가지고 놀았으며 반대편에는 젊은 사람들이나 학생들이 대화하거나 노트북의 코드를 콘센트에 연결해 과제를 하는 광경이 비쳤고 방 안에는 한쪽에는 앉아서 차를 마시며 조별과제를 토론하는 대학생들, 다른 방에서는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다례를 배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영영이 방문 옆으로 가서 노크를 하자, 다례를 손님에게 가르치던 아르바이트생이 영영에게 인사드린 후,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에서 나와 물었다.

“사장님, 계약 잘 끝나셨어요?”

영영이 차려입은 정장을 정돈하면서 말했다.

“어, 그래. 좋게 끝났지. 형빈아. 부족한 재고는?”

아르바이트생은 상자를 보여주며 말했다.

“오늘 도착했어요. 전화가 오긴 했는데 저는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제주도 사시는 할머니이신 것만 말씀드릴게요.”

영영은 웃으며 손님 주문을 돕는 알바 생에게 말했다.

“인마, 제주도도 우리말 쓰거든. 게다가 김 씨 할머니이신 거 같은데 그 할머니 토박이가 아니라 타지방에서 내려오셔서 오랫동안 사신 분이라고. 그 할머니 사투리는 애교지 애교.”

"어? 얼마나 사셨는데요?"

"한 몇 수십 년?"

영영의 말에 아르바이트생은 기가 막혀서 혀를 차며 말했다.

“나 원.. 아무튼, 부쩍 손님이 많아져서요. 안 그래도 부족한 재고가 문제예요. 가뜩이나 오늘 오후에 식약청 단체 손님들 사랑채 방에 예약잡고 오시는데.. 그리고 뜬금없지만 가게 이름이나 컨셉 때문에 무협소설 마니아 손님들이 코스프레하고 오는 경우도 있어서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어휴, 그나저나 평소와는 다르게 정장 짝 빼입으시니 뽀대 좀 나시는데요?”

"흐흐, 맞춘건데 라인좀 사냐?"

"인물도 훤칠하시고 기럭지도 제법 있으시니 때깔도 고우십니다요. 크크. 누가 보면 졸업사진 찍으러 가시는 줄 아시겠네요."

영영이 웃으며 손으로 아르바이트생과 죽이 잘 맞게 하이파이브를 한 후, 옆구리를 몇 번 치면서 말했다.

“데이트 비용 필요하면 말해라.”

“히힛, 나중에 끝나고 술도 사주시는 겁니다! 아, 사장님을 찾으시는 분이 계셔요. 5번 테이블예요.”

아르바이트생이 가리키는 곳을 그가 바라보자 그 자리에는 노 교수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랜만이십니다. 교수님."

"자네도 그렇게 차려입으니 아주 멋져 보이는구먼."

노교수의 칭찬에 영영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신경써서 꾸민 건데 감사합니다. 한동안 안 오셔서 얼마나 섭섭했다고요, 하하.”

영영이 테이블로 다가가 인사한 뒤, 노교수 앞에 놓인 다른 차를 정리할 겸 만지려 하자 노 교수가 손을 들어 제재했고 영영은 그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저, 이것에 대한 답을 이제 알겠습니다.”

영영이 고이 접은 글귀가 적힌 종이를 돌려주자 노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 그거 정말 반가운 소리로구먼! 거짓말은 아니겠지?”

영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교수도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의미를 새로이 알았다니 고것 참 다행이로구먼. 나도 그렇고. 사실 내가 좀 바빴네. 이번에 버킷리스트를 시작했거든.”

“버킷 리스트요?”

“그래. 죽기 전에 해야 할 것들 말일세. 그중 하나를 하고 있지.”

노 교수는 가방에서 한 여자 분의 사진을 꺼내 영영이 만지려 했던 다른 찻잔 옆에 놓이도록 테이블에 두며 말했다.

“내 아내라네.”

영영은 사진 속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고우신데요.”

“그래야지, 젊었을 때 여자 보는 눈은 정확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 세상에 없네.”

영영이 조심스럽게 노 교수에게 말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자네가 뭐가 죄송하나. 난 여기서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이루고 있는 걸. 자네 가게에서 임자와 한방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것 말일세.”

영영이 노 교수의 눈에 서글픔이 고이는 걸 바라보며 숙연하게 바라보았다.

“비록 임자가 내 말에 답하지 않긴 하지만. 넥타이 메주고 양복 다려줄 때 그 고마움 하나 안 잊고 나중에 표시하긴 했으나 내가 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사무쳐 이렇게 단출하게라도 해주고 싶었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노 교수는 영영을 쳐다보면서 사진속의 아내에게 말했다.

“임자, 이 청년이 차는 아주 기막히게 다린다우. 뜻뜻한 차 한 잔의 올라오는 향과 김이라도 마셔보구려.”

주름살과 메마른 피부가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는 노교수의 얼굴에서는 눈가의 물기가 축축한 채로 눈동자에 고인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그리고 내 아내 앞에서 자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네만.”

“무슨 말씀을.”

영영이 깜짝 놀라 묻자 노 교수가 손수건을 꺼내 눈매를 닦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경솔해지고 독선적이 된 것 같네. 원래 나같이 늙은이들이 황소같이 드센 고집이 좀 있지 않나. 자, 여기 이 가게의 손님들을 보게. 젊은 사람들이나 나이 있는 사람들이나 한방차를 마시고 전통 방법으로 만들어진 다과를 먹고 있지 않는가. 게다가 서양의 카페문화나 웰빙 같은 건강 지향 문화 등 현대적인 트렌드도 다 섞여져 있지. 문화란 이렇게 소통되고 시간과 세대 속에서 이어져 나가야 하는 것인데 난 그저 갇힌 시간 속에서 폐쇄적인 입장만 취했던 것 같네. 한때 묻힌 과거를 밝히고 발굴하여 지금으로 되살려 내는 게 내 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묘하긴 하네, 난 박물관이나 민속촌, 사진이나 그림에서처럼 그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를,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답다는 노랫말처럼 앞으로 그 상태 그대로 있기를, 그러기를 바랐었던 걸세. 물론 한쪽의 균형이 붕괴하여 어느 쪽의 정체성도 가지지 못하는 우려되는 부분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야. 사실 그게 두려워서 자네의 타협안을 심히 경계했던 것이고, 이제 그 균형은 자네가 지금처럼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네. 자네는 양쪽 모두를 알고 있고 사랑하니까, 이 늙은이가 비록 역사와 그것에 관련된 문화재를 조사하고 기록과 논문으로 박제시켜 남겨놓는 학자였으나 자네는 다르게 접근해왔고 그것을 새롭게 증명하면서 입증까지 해내는 것 같구먼. 이제 이해하겠네. 자네도 부디 이 늙은이를 이해해 줬으면 하네.”

영영은 당황하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아니 교수님.”

노 교수는 사진을 다시 집어 놓고 남은 차를 마신 후,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실은 자네 카페에 항상 오게 된 이유가 이 차 말고도 하나 더 있는 데 말이야.”

“네.” 영영이 그를 정중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교수직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다가 손을 놓으니 많이 아쉽더군, 여기에서 현역 교수들도 만나고 그 옆에서 학점과 학문에 열중하는 학생들을 보니 정말 학생들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며, 제자들의 전임 교수가 되어 지도도 해 줄 때의 기분이 들더구만. 이 나이는 이런 게 문제라네, 이미 오랜 시간을 인생에서 잘 보내놓고도 아쉬움에 안타까워하는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이제 나도 얽매이지 않게 버킷리스트를 하러 가야겠네.”

“다른 하나는 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찻잔을 들어 남아있던 차도 들이키던 노 교수가 말했다.

“백제 고분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박사 학위 논문 주제였지. 거길 시작으로 아내와 전국을 여행하려 하네.”

“지금부터 말이십니까?”

놀라는 영영에게 노교수는 깊은 눈웃음과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되네. 난 앞으로 살날보다 살아간 날이 더 많으니까. 이 가게는 갔다 오고 나서 꼭 들르겠네.”

“조심해서 다녀오십쇼. 교수님.”

짐을 챙기고 계산을 마친 후, 나가려는 노 교수가 배치된 찻잔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이걸로 살 테니 좀 놔두게. 서재에 두고 싶도록 아주 곱고 예쁘구먼.”

“지금이 아니면 안되시는데요.”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웃음으로 화답했고 포장된 다기 상자와 서비스로 차 봉지까지 든 노 교수가 영영의 배웅 아래 그 모습이 완전히 멀어지자 영영은 뭔가 알아보려는 듯 바깥 계단을 타고 건물 2층으로 올라가 한창 건물 리모델링 중인 현장 주변을 둘러보고 살피면서 감독관에게 진척 상황을 물어보고는 소음이 들리지 않는 1층으로 내려와 건물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주인아저씨. 계약 맞췄고 위층 확장 리모델링도 예상기간 내에 맞출 수 있다네요.”

그러자 가게 주인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래, 진 사장도 이제 프랜차이즈로 시작해 봐야지. 자리에 비해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장사가 잘되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고! 하하하. 그래서 내가 필요한 서류랑 허가 다 받아놓고 2층 싹 리모델링해서 너희 가게 확장하게 도와주는 거 아니냐.”

영영은 태도가 바뀐 주인의 말투가 맘에 안 들긴 했지만 자리를 주선해준 도움을 줬으니 웃으며 말했다.

“물심양면 정말 감사합니다. 가게세 올리시고 가맹점이 되라고 하던 분이 사무실로 쓰시던 층을 내주시고 이렇게 지원해주실 줄이야.......”

“하, 그건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지. 그땐 뭐 객관적으로도 네 가게가 실적이 좋진 않았고 그걸 만회하겠다고 이것저것 했었던 것들이 다 그럴만한 비즈니스의 일환이니까, 그래서 오히려 너와 네 가게가 잘되고 인정받으니까 내가 억지 부렸던 것에 대한 미안함에 더 신경써주는 거기도 하고, 아무튼 이번에 내가 새로운 건물 지은 대로 사무실을 빼서 어차피 3층 이상은 몰라도 2층은 내가 사무실 말고도 주거 공간 등 다양하게 쓰던 곳이다 보니 그냥 임대를 낼까 하다, 가! 차라리 요즘 장사 잘 되는 니네 가게에 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아는 동생들 일감도 줄 겸, 싹 밀고 준거지 뭐, 어차피 네 카페 그 뭐냐, 인기 좋은 방이 2개 밖에 없으니까 손님들이 예약도 걸고 기다리느라 불평도 많다며, 건물 구조상 확 갈아엎지 않아도 되니까 괜찮더라. 인테리어용 자재는 네가 말한 업체로 해줬는데 아는 사람인가 봐?”

“예, 비오는 날에 도움 좀 받았거든요.”

“뭐, 어쨌든 나 같은 건물주야 임대료 꼬박꼬박 내고 받아먹으면 그만이지만 내가 그동안 너에게 이래라저래라 크게 실수했던 것도 있고, 너는 사람이 좋으니까 이제부터라도 반성하고 손해냐 수익이냐 돈보고 투자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에게 투자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훗, 그 전보다 더 최상품으로 차 선물 드리겠습니다.”

“임마, 너에게서 좋은 건 질리게 달여 마신 것 같으니까 몸에 좋은 술이나 구해와 한 대접 올려라.”

둘이 서로 수화기 너머로 웃음을 주고받은 뒤, 건물 주인이 말을 이었다.

“건물 확장된 것이 자리 잡아야 나중에 2호점도 시작할 텐데 아직 시간이 한창이나 남았다지만 교육계획은 잡은 거지?”

“일단 원료 제공 농장 측에 미리 알려줬고, 원래 이 방면에서 기술을 배우는 게 원래 오래 걸려서요.  많은 시간이 드는건 어쩔 수 없겠지만 교육에 대한 열의랑 차를 좋아하시는 분들로 알아보고 잘 만나서 좋은 입지로 자리를 잡으면 처음에는 몰라도 시간이 지난다면 크게 손해 입는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아무렴, 니가 지금껏 해왔던 게 쉬운 길이겠냐. 그렇게 가맹점을 늘리게 되면 네가 본사가 되는 거야. 책임자가 되는 거라고, 사업자가 괜히 사업자고 사장이 사장이겠어. 그쪽이 잘못되어도 브랜드라 니가 다 뒤집어쓰는 거라고. 돈과 관련된 일이란 양면과 같아서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거야. 그런 위험부담을 다 껴안으면서 손해 안보고 손익 뜯으려 머리 굴리며 사는 게 이 바닥이고.”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덕분에 가게도 근사해지고 경영을 공부하게 됐네요.”

“흐흐, 아무쪼록 잘 해봐라. 이왕 해보는 거, 거창해져 봐야지. 사기 같은 거 당하지 말고 망하지도 말고 계약서는 항상 잘 살피면서! 투자자 실망시키지 말고.”

끊어진 전화를 주머니에 쑤셔 박은 영영은 아르바이트생에게 한 구석에 있는 개다래나무 가지를 물고 행복에 겨워 침까지 흘리면서 자고 있는 고양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손님 빠지고 시간 좀 되면 지금 사례금까지 합쳐서 페이 줄 테니까 우리 ‘나비’좀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고양이 종합백신 3차 접종 좀 맞추고 와라. 지금 내가 바빠서.”

아르바이트생은 영영이 지갑에서 꺼내 준 돈을 받으면서 웃으며 말했다.

“네, 그저께 진눈깨비도 오고 날씨가 풀렸다 안 풀렸다하니까 나비를 안에다 뒀더니 지가 편해졌는지 이젠 밖에 나가려 하질 않네요.”

“그러게, 털 알러지 있는 손님이나 위생문제 소리 듣기 전에 밖의 집에다 둬야하긴 할텐데.

"일단 목욕을 날마다 시키고 있으니까요. 털 날리지 않게 옷도 입 혔고요. 손님들이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눈치껏 잘 안보이는 곳에 두고 있어요."

"아, 그래. 아주 잘하고 있어! 그나저나 아직 안 늦었겠지?”

“예, 그럼요. 걱정도 많으셔.”

“그럼 감국 차 좀 내가 이야기한 대로 줘볼래, 따뜻한 걸로.”

“아, 그거요?”

아르바이트생이 부엌으로 들어가 컵이 2개 들어가는 손잡이가 달린 박스 종이 캐리어에 컵홀더를 씌운 말린 국화가 든 투명 플라스틱 컵 하나, 뜨거운 물이 든 플라스틱 컵 하나를 테이크아웃하여 건네주자, 그걸 받은 영영이 옷깃을 만지며 물었다.

"말씀 하신대로 준비해 놨습니다."

“잘했어, 나 좀 어때 보이냐?”

“방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지금 딱! 잘 빼입으셔서 깔끔하신데, 정말 가보시게요?”

“지금이 아니면 안돼.”

“하긴 그런 모습이면 누구에게라도 깜빡 죽을만큼 멋지게 보이시겠네요. 크크큭”

아르바이트생이 웃으며 말하자 영영은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후, 재빨리 종이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가게를 나섰다.

그 모습을 본 아르바이트생은 혀를 차며 말했다.

“어휴, 은근히 단순하시긴. 그렇게 좋으실까.”







대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졸업식 복장을 한 혜미가 들뜬 표정으로 다른 친구들과 같이 사진을 찍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휴, 기지배. 나중에 또 만나자.”

“응, 잘 지내.”

“우리 과대, 잘 살아야 해!”

“알았어. 걱정마! 헤어지기 전에 셀카나 같이 더 찍자!”

그렇게 무리와 헤어지면서 정문으로 걸어가던 혜미는 정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영영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왠일이세요?”

영영이 달려오는 혜미에게 인사하면서 컵 캐리어를 꺼내들며 말했다.

"한 번 밖에 없을 날 예쁘게 꾸미고 왔을텐데, 이왕이면 예쁜거 보여주고 주려고 왔죠."

"에? 하긴 뭐, 엄마도 일하고 계셔서 못 오시는데 익숙한 얼굴을 뵈서 반가워요. 그나저나 컵이 두개네요?"

영영이 캐리어를 내려놓고 투명한 플라스틱컵의 컵 홀더를 빼서 시든 내용물을 보여주며 말했다.

"자, 여기 시들고 살짝 어둡게 마른 꽃잎이 보이죠?"

"네." 혜미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학사모를 고쳐쓰며 말했다.

영영이 미소를 지으며 뚜껑을 열고 다른 컵에 든 뜨거운 물을 그 안에 붓자, 시든 감국 꽃잎들이 김이 모락모락나는 물에 반응하여 두둥실 본래의 노란 꽃이 피어나듯 부풀어오르면서 맹물을 밝고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여갔다.

"우와! 대박! 다시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아요! 감국차를 많이 마셔본 것 같은데도 아름답고 달빛 같이 너무 예쁘다!"

"예전에 감국차 마실 때 안이 비춰지지 않는 일반 다기라 이런 예쁜 모습을 못 보여준 것 같아서요. 아무리 시간과 풍파에 시들고 말라가도 언제든지 아름답게 꽃 필수 있거든요."

영영은 다시 홀더를 씌운 감국 차를 혜미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셔요. 가게 확장도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오늘 프랜차이즈 계약을 따내서 무림일검 2호점이 생길 것 같아요."

“와! 잘됐네요. 사기가 의심될 만한 계약은 아닌지 검토 충분히 잘 하신 거죠? 이런 건 법적 효력이 있도록 철저하고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요. "

참, 이렇게 커지고 늘어난다는 건 손님도 훨씬 많아졌고 많아질 거란 이야기도 될 텐데. 정말 많이 발전했네요. 축하해요.”

영영은 빈 플라스틱 컵과 캐리어를 치우고 나서 혜미가 확인 할 수 있게 가맹점 계약서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쪽이 많이 도와줬죠.”

그녀가 그의 말에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당연하죠. 2층 공사 다 끝나면 또 제가 그림이랑 인테리어 부분 이라든지 이것저것 도와줘야 하겠지만.”

“2층엔 방에 진짜 창문이 있어서 그런 방은 습기걱정이나 가짜 창문 만들 필요도 없어요.”

“그럼 그 땐 잘 꾸미면 햇빛도 비추고 바깥도 보이고 근사하게 나오겠네요. 아저씨.”

영영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 때는 근로계약서 작성하는 건가요. 최고임금제에 보너스까지 합쳐서요.”

그녀가 장난치지 말라는 듯 영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자 그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니 그쪽이 법적 효력이 있게 철저하고 확실하게 하라면서요. 애초에 가게 그림들도 그쪽 저작권일텐데.”

“치, 진짜 이 아저씨는. 그럼 이제 2호점 거긴 ‘무림이검’인가요?”

영영은 그 말에 웃었고 감국차를 빨대로 한 모금 마신 혜미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자판기 아저씨.. 아니, 이제 가게 밖이니까 오빠가 가맹업주들 수능공부시키듯 피터지게 달달 외우게 하고 교육시키면 되겠죠. 뭐."

혜미와 영영이 그 말과 함께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 혜미가 웃음이 잦아들자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사회초년생인데 졸업하면 갈 때는 있어요?”

그 말에 혜미가 감국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답했다.

“글쎄요. 알아 봐야겠죠. 일단 제 계획은 일하면서 돈 모은 다음에 4월에 대학원 모집요강보고 9월부터 일이랑 학업 병행하며 다니면서 학비 충당하려고요. 아무래도 경영학과라 대학원이든 마케팅 쪽이나 경영 쪽이든 취업할 때 그 방면에서는 이런 실무경험을 비교적 높게 쳐 줄 테니까요. 가정형편 상 온갖 잡일들을 많이 할 만큼 돈에 시달려온지라 특기 적성 다 제쳐두고 경영학과에 가면 돈을 좀 많이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뭐, 할 일 많은 건 똑같지만.”

“경영학과요?”

혜미는 미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그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우리 가게는 어때요. 경영과 마케팅 해 주실 분도 필요한데. 아니면 저희가 이번에 다른 대기업과도 여러 번 우호적으로 접촉을 해서 그쪽 관계자분들도 알게 됐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까하하하.”

혜미는 한바탕 웃더니 말했다.

“아까 서로 농담하긴 했지만, 아저씨 가게는 제가 언제나처럼 도울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도움 받은 것도 있고.”

영영은 뒤의 말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냥 넘어가며 말했다.

“감국의 꽃말이 가을의 향기인 거 알아요?”

“그래요? 난 노란 국화처럼 보여서 이별, 짝사랑인 줄 알았는데.”

“가을에 잘 저장해 놓은 걸 우려낸 거예요.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혜미를 바라보던 영영은 다시 나지막이 말했다.

“척하는 사람들끼리 이제 사랑하는 척도 좀 해보죠? 저희 가게 좋은 효능 지닌 차들로만 엄선해서 VIP로 모셔 드릴 테니 이야기도 좀 나눠보고, 데이트도 해보고요.”

혜미가 웃으며 대답했다.

“취업 걱정해야 해요.”

“저 사장님이에요. 가게는 아르바이트생한테 맡겨놨고. 이건 뭐 마케팅 해주는 사람이 엄청나니 수익이 안 늘고 배길 수가 있어야지.”

“아, 그럼 거기 2호점은 재료 어떻게 받아요? 거기도 택배나 직접 농장 찾아가야 하나요?”

“뭐, 제가 거래처를 알려주고 택배를 받거나 제가 직접 현지에서 구매한 재료를 2호점에 찾아가서 공급해 주는 식으로 유통이 되겠죠.”

혜미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아예 거래처 농장들이랑 소비자를 이어주는 유통망을 중간에서 한번 만들어 봐요. 그럼 차 재료들을 사람들이 쉽게 구할 수 있고 더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겠죠. 아저씨 신용이면 농장이든 거래처든 충분히 믿고 맡길 것 같은데요. 추후 늘어날 점포들이 재료 유통을 받는 부분에 있어서 한결 수월하고 거래처 농장들도 구매가 늘면서 마찬가지로 소득이 늘 것이고요. 게다가 중간에서 수수료만 받아도 가게 운영 말고도 부가적인 수익을 더 얻을 수 있잖아요.”

“아, 그러네, 그런 방법도 있었지. 이번에 사업이 확장되면 구축해봐야겠네요.”

영영이 그런 방법이 있었냐는 듯 놀라며 박수를 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근데 2호점에 사람들이 많이 갈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그렇고요,”

“물론 인지도가 부족하니까 시간이 지나서 자리를 잡으면 좀 오시겠죠,”

“아뇨, 거긴 아저씨가 없잖아요.”

혜미는 자신을 바라보는 영영에게 애써 미소를 한번 지어주고는 풀이 완전히 죽은 표정으로 아주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 있잖아요. 이거 오해 하지 말고 들어주셔야 해요.”

혜미는 조심조심 고민 많은 얼굴로 천천히 가방을 열어 ‘졸업 작품-실제 마케팅 응용사례연구-한방차 카페 유형에 관한 영업적 성과’ 레포트를 천천히 꺼내며 영영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그러니까 있잖아요. 원래 이렇게 하려던 게 아닌데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무심결에 영영 씨와 제가 얼떨결에 가게를 손본 것에 대한 결과를 상업적인 영역에 대해 교수님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팁을 주실까 하는 생각에 교수님에게 이야기해 봤더니 4학년이 기본적인 학문도 없이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로 만들어 못 오느냐고 꾸중하셔서 할 수 없이 나름대로 통계도 내보고 어떻게든 조언을 구할 겸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해보았는데 교수님이 사례가 정말 좋아서 단순 보고서로 쓰기엔 아쉬울 만큼 상당히 가치가 있다고 좀 더 큰 것에 내 보라고 권유했는데 그게 어쩌다보니 졸업논문이 돼버렸지 뭐예요. 진짜 저도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정말 죄송해요.”

영영은 미안함에 안절부절못하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혜미를 그저 바라보았다.

“변명 같겠지만 정말 계산이나 이용하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정말 아무 의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오해를 받아도 할 말 없을 일을 만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학사모를 벗어 두 손으로 잡고 미안함을 표하며 고개를 숙인 혜미의 죄책감이 든 표정과 손에 쥐어진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잠깐 멍하니 있다 빙그레 미소를 짓고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됐네. 그럼 이번엔 나도 도움이 된 거죠? 내 덕에 졸업한 거니까 이제 서로 한쪽만 도움 받는 게 아니라 양쪽이 도움을 받은 동등한 위치잖아요.”

혜미가 놀라며 영영을 쳐다보자 그는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

“애초에 날 믿지 않았다면 말해주지도 않았겠죠. 이해해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뭐. 이제 서로 같은 위치에서 잘 시작해 봐요.”

혜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을 멈추고 눈을 뜬 혜미는 한 손은 쓰다듬어진 자신의 머리를 단정히 하며, 학사모를 쓰고서 그의 팔을 잡고 그와 같이 걸어가면서 그처럼 미소를 지었다.

레포트를 가방에 넣은 혜미는 학사모와 졸업식 복장을 반납한 뒤, 조금 전처럼 분위기를 잡으며 영영의 옆에 바싹 붙은 후, 말했다.

“막상 졸업하니까 이때까지 굴곡을 넘나들고 온갖 경험을 하며 살아왔던 게 뭔가 격세지감이 드네요. 새로운 변화 앞에서요.”

영영이 그녀의 팔을 잡아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사람이야 다 적응하면서 사는 거죠. 자기가 바랐던 모습이든 실은 아니었든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니까요.”

영영의 팔짱에 당황한 혜미가 순간 당황해 볼이 붉어지자 영영이 웃으며 능청스럽게 속삭였다.

“그중에서 혜미 씨처럼 상황이나 처지가 어떻든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산다면 그 자체로 아름답겠지만 말이죠.”

“치, 지금 말씀하시는 분도 만만치는 않네요. 참, 우리 교수님이 그러셨는데. ‘구가이불귀, 악지기비유야(久假而不歸, 惡之其非有也)라는 말이 있대요.”

“내가 한자는 좀 아는데, 즉 오래도록 인자[각주:1]인 척하면 그가 인자가 아닌 걸 누가 알겠느냐는 뜻이네요?”

“맞아요. 맹자의 진심장구에 나오는 글귀죠. 어디 척하는 사람들끼리 잘 해봐요. 빛을 냈다는 사실은 변함없도록요. 누가 의심할 수 없게 계속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 자체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맛있다. 이거, 빛깔도 예쁘고.”

영영은 얼굴에 가득한 빙그레 미소 함께 혜미를 끌고 대학교를 나서며 말했다.

“좋네, 서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어색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요.”

혜미는 영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걸으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데이트 코스는 그 쪽이 정해야죠! 전 이제 막 졸업했는데.”

세상 속의 그들의 첫차 맛은 썼지만, 그 후의 그들만의 차는 세상 속에서 단맛을 은은하게

퍼트리고 있었다. <fin>




  1. 仁者 , 덕이 있는 어진 사람, 유교 사상에서의 성자에 해당하는 상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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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찻집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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