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미는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앞치마를 두르고 물감을 듬뿍 뭍힌 붓으로 벽에 칠을 하면서 말했다.
"근데요. 아저씨! 이거 아크릴 물감이라 거의 안 지워져요. 혼자 못 지울 거 같아요."
"아 진짜!!"
그렇게 짜증을 부렸지만 의자의 푹신함과 편안한 느낌에 사로잡힌 영영이 졸면 안 되는데 혼잣말하면서도 몸은 솔직하게 의자에 전신을 파묻으며 자는 사이, 뭔가 옮기는 듯한 둔탁한 소리, 코를 찌르는 젯소 냄새 같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가끔 느껴지긴 했지만 일어나서 따지기엔 얄궂은 피로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 간 후, 도저히 기다리다 못한 혜미는 앞치마를 벗어든 채 영영을 억지로 깨웠다.
“일어나 봐요. 진영영 씨, 자자자, 겟업! 헐리헐리!”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대는 혜미를 본능적으로 제지한 후,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옷 매무새를 정리한 영영이 하품을 하며 눈을 감은 채 기지개를 켜자, 혜미는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푹 쉬었죠? 이제 그쪽도 도와주셔야 해요.”
“뭐를요. 음, 어? 어!!!”
깊은 잠과 이별하는 게 아쉬운지 눈에 물기가 글썽거리는 영영의 눈에는 벽에 그려진 푸른 숲이 마치 무림을 상징하듯 한복판에 자리 잡아 비치고 있었고 반대 벽마다 꽃이나 나무 같은 들판의 이미지와 더불어 매화가 수놓은 마당의 초가집이나 조선 시대 풍의 명당에 놓인 기와집들이 놓여 있었으며 바깥과 통하는 유리 벽에는 스티커로 글씨들이 화려하게 붙였고 주변은 다 쓴 아크릴 물감들이 색깔별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다 쓰거나 아직 내용물이 담겨있는 젯소 통과 공구들, 어느 학원에서 떼 왔는지 커다란 칠판이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체 이게?”
혜미는 웃으면서 전동 드릴을 들고서는 사다리를 타고 원래 붙어있던 메뉴판의 고정 나사를 풀어버리며 말했다.
“잠시만요, 일하느라 바빠서요. 아니다 마침 잘 되었네요. 이거 그냥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나사 푼 쪽이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셔야 해요.”
영영이 정말 황당한 표정으로 이미 나사가 풀려 기울어진 쪽을 잡자, 다시 혜미가 반대편으로 사다리를 옮기고 올라탄 뒤, 곧바로 나사를 풀자마자 균형을 잃은 메뉴판을 혜미와 영영의 힘으로 받아내면서 무사히 땅으로 내려왔다.
“어때요? 저 그림 좀 잘 그리죠? 캬, 내가 봐도 분위기 좀 사는 것 같네.”
혜미가 자기 자신도 감탄하여 웃으면서 돌아보자 영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네. 잘 그린 건 맞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왜 이렇게 남의 가게를 뒤엎어 놓은 건데요? 아니, 그보다도 무슨 숙녀분이 이런 걸 다?”
혜미는 담담하게 칠판의 한쪽을 들고서는 영영한테도 잡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먹고 살려면 다 할 수 있게 되어 있답니다. 딱 봐도 이게 기본적인 기초 인테리어잖아요. 아,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이거 올려야 하거든요.”
영영이 지금 와서 뭐라고 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최대한 참을성을 총 동원해 마음을 억누르려 하자 혜미가 그것을 비웃듯 불만섞인 투정을 부렸다.
“아, 그리고 뒤엎었다가 뭐에요. 기껏 힘들게 그려놓으니까 판 다 깨는 부적절한 표현 진짜! 그림 한두 점에 분위기가 이렇게 사는데!”
혜미의 신빙성을 대동한 짜증 섞인 반응에 위축된 영영은 어쩔 수 없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화답했다.
“어, 일단 알았어요. 일단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난리가 내 가게에서 빨리 끝나야 하니까요.”
그렇게 새 메뉴판인 학교에서 누구나 봤을 어둡고 짙은 청록색에 가까운 빈 칠판을 달고 미술 작업을 마무리한 혜미가 주변 청소와 함께 공구와 자신의 물품들을 정리하는 사이, 영영은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벽에 그려진 그림들은 대나무 숲이나 풀이 무성한 초야나 푸른 하늘과 같은 무림의 상쾌하고도 부드러운 느낌과 선(先)시대 문화적인 요소들 같은 옛 전통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는 느낌을 강조한 아름다우면서도 정갈한 이미지들로 채워졌고 유리 벽에는 곳곳에 스티커 종이에 그림을 그려 붙이거나 붓으로 그려낸 여러 아기자기한 전통 문양들, 특히 무림일검의 로고들이 군데군데 붙여서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 이렇게 바뀐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니 새롭게 느껴진 영영이 혜미에게 물었다.
“저 칠판은 어디서 구한 거죠?”
“아, 저거요? 저의 구 강의실 공사 중이라 폐기처분이 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준다는 조건으로 염가에 샀어요. 물론 혼자 들고 오긴 무거워서 아는 사람을 부르긴 했어요. 인건비는 뭐 감수 해야죠.”
“그런데 저 젯소 통도 그렇고 물감들도 좀 많아진 거 같은데, 가지고 온 가방에는 별로 없었잖아요.”
“주무실 때 제 돈으로 더 사왔죠.”
“예?”
영영이 놀라면서 물었다.
“왜 그쪽 돈으로 사서 이런 일을 벌여요.”
그러자 혜미는 한심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쪽이 재료에만 신경 쓸 줄 알지 가게에는 투자를 안 하니까요!”
영영도 발끈하며 말했다.
“바뀌기 전의 가게도 내가 조성해 낸 인테리어이자 컨셉이었다고요!”
“그래서 손님이 없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너무도 평범하고 단조로워서 우울해질 것 같은 분위기인 데다가 조금만 기분 나쁘고 생소하면 발길을 돌려버리거나 딴 곳을 찾는 게 손님인데 말이죠.”
영영은 감정이 복받친 듯 말했다.
“난 내 소신 하나면 지키면 돼요. 가게가 어렵다고 해도 망할 정돈 아니고요.”
“히, 그건 장부가 증명해주는 거죠. 아저씨 말로 판단하는게 아니고요. 근데 소신이라고 하셨죠. 음....... 글쎄, 있잖아요. 전통 차의 문화를 지키려면 많은 사람이 그 차를 알아야 하고 마셔야 해요. 하지만 지금처럼 먼 훗날 40~50대가 될 지금의 20~30대 층이 외면하는 이곳에서 그게 될까요? 그쪽이 말하는 ‘보존’만으로 그런 게 계승될 것 같아요? 이대로 계속하다간 고인 물이 썩거나 증발되어 없어지듯이 쇠퇴해 버릴걸요. 오히려 서로 좋게끔 조금씩 위화감 없이 합쳐서 좋은 반응을 일단 창출해 내고 그로 인해 이 가계의 손님들이 많아져야 그 차들과 차 문화에 대해 인지도와 관심도 오를 테고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판매한 차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일상생활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끔 유도 하는 게 더 훨씬 좋은 계획일 거라고요!"
그는 단호한 혜미의 말에 아무 말 못 하고 수긍하며 묵묵히 뒷정리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일리가 있는 말들이라서 반박할 수 없었고 사실은 말싸움으로 저 여자한테 이길 자신이 없기도 했다.
영영은 뒷정리를 끝내고 현금지급기를 열어 현찰로 그녀가 지불한 재료 금액을 보상해 주려다가 단호하게 거부당한 후, 뭔가 생각 난 듯 말했다.
“그런데 지금 내 가게 영업 중일 텐데요?”
“그래서 내부공사로 쉰다고 문에다 달아 놓았어요. 그 정도 손해는 투자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이제 우리 가게죠.”
영영이 황당해 하며 되물었다.
“아니, 어떻게 ‘우리’에요. 엄연히 내 가게인데!”
혜미는 주변을 보라는 듯 팔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이걸 다 누가 바꾸었나요. 그리고 이걸 누가 마무리할 건지도요. 나와 그쪽, 이렇게 ‘우리’잖아요. 같이 한 배를 탄 거죠.”
영영은 너무도 기가 막혔지만, 왠지 이 여자와 말을 섞으면 계속 끌려 다니는 느낌이라 겨우겨우 반박하고 싶은 자기의 입을 간신히 막으며 침착 하려고 매우 애를 썼지만 뭐라도 한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업계획서를 꽂아둔 장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거 봐요! 엄연히 내 가게라고 증명할 수 있는 증거니까요!"
혜미가 살짝 당황한 듯한 기색을 보이자 잠깐 반색한 영영이었으나 혜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점점 일그러지자 오히려 더 불안함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왜 이래요? 뭔 수입, 지출, 원가비, 세금이 다 끔찍할 정도네. 아저씨, 여태까지 융자 안하고도 버티는 게 말이 돼요? 야, 근데 독특하게 손해가 어느 정도 커버가 되서 지금 당장 망할 정도는 아니라는게 사실이었다니 참 신기하네요."
혜미가 영영의 장부를 빠르게 넘겨보면서 혀를 차며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약을 올리자 영영은 마치 잘못 치룬 시험지를 부모님에게 들킨 아이처럼 겸연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금 유통도 한심하고,, 손익계산서도 다시 손봐야 할 것 같은데.. 어? 7,8월은 아에 날려먹었네요. 이땐 장부 쓰기를 포기하신것 같은데 틀린 것도 많고 진짜 처음부터 깔끔하게 다시 계산해서 통계 내드리고 싶네요!!"
발끈한 혜미가 툭툭 말을 던지자 영영은 장부를 뺏다시피 하면서 툴툴거리며 하소연하듯 응답했다.
"아니, 보라는 건 안보고 엉뚱한 것만 보고 그러는지..."
혜미는 그런 영영의 모습을 보고 까르르 웃으며 영영의 등을 두드리고서 말했다.
“괜찮아요. 덕분에 지금 하는 작업에 희망이 보이는 걸요. 더 나빠질 곳이 없다니 반대로 앞으로 나아질 것들만 있다는게 좋네요. 이제 여기저기에 냄새가 빠지면 본격적으로 계획을 시작할 거예요.”
이번엔 영영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를요?”
그녀가 팔짱을 끼고 스케치북의 다음 장을 피고 가게 주변을 돌며 말했다.
“영영 씨네 가게는 내가 이런 쪽으로 경험이 많아서 아는데, 소재는 정말 좋아요. 한방차 카페란 매력적이고 요새 뜨는 아이템이라고요. 하지만 영영 씨의 가게는 전통을 살린다지만 ‘카페’의 느낌이 결여된 그야말로 오래된 건강원이나 다를 바 없다고요.”
“길게 설명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이 가게에 부족한 거, 제가 알고 있으니까 채워 주겠다고요.”
그는 혜미가 보여준 스케치북에 주요 소비자층을 의식해 가게의 방마다 할 디자인들의 계획들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게 안은 언제 다 돌아봤데?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해서 나한테 원하는 것이 뭐죠?”
혜미는 단호히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없어요.”
“예? 다시 한 번 말해줄래요?”
영영이 정말 당황하며 물어보자 혜미는 역시나 단호했다.
“없다고요.”
영영은 어이없다는 듯 혜미를 쳐다보며 크게 웃다가 갑자기 진지해지고서 말했다
“솔직히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정말 힘드네요. 어떻게 당돌해도 이렇게 한계를 느끼게 할 정도로 당돌해요? 정말, 가게 주인인 내가 이렇게 갑자기 우발적으로 들이 닥쳐진 일에 대해 어떤 기분일지 생각은 해 봤어요? 차라리 사전적으로 나랑 상의했으면 내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 것 아네요! 게다가 이 상태로 손님을 어떻게 받아요?”
혜미는 뜨끔한 듯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야, 이렇게 먼저 기습적으로 선수 쳐야지 그쪽이 빼도 박도 못하고 내 말을 들을 거 아네요. 물론 이런 방법을 감행할 정도로 너그러워 보이시기도 했지만. 하여튼 그렇게 자기 생각에 맹신적인 사람에게 사전적으로 말해봤자 지금같이 거부하는 말 들을 것이 뻔한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도 그걸 모른 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물론 내가 무례했지만, 이건 그쪽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보니까 고집도 세시던데, 그리고 어차피 내부공사고 열어봤자 손님도 없는데 그냥 새 개장준비 안내문 붙여놓고 잠깐만 영업 쉬어요.”
영영은 계속 끌려 다니다가 혜미를 압박할 구실을 찾게 된 것에 마음속으로 매우 흡족해하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사과하세요. 이 난리에 대한 나의 정신적, 금전적 피해를 생각한다면요.”
혜미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다가 체념한 듯 말했다.
“어휴, 참. 그래요! 내가 사전에 양해도 없었고 계약도 없이 손댄 건 미안했어요.”
영영이 매우 통쾌한 듯 미소를 짓자 혜미가 발끈하며 말했다.
“치, 정신적 피해라뇨. 내가 그쪽 잘되라고 무상으로 고쳐주는 중인데 피해? 금전적은 또 뭐예요? 나도 금전적으로 깨졌거든요? 참, 기가 막혀서.”
“일단 정신적, 물질적 보상해 달란 이야기는 앞으로 안 꺼낼 거고 이미 벌어진 일은 지나간 거니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죠. 우리 가게에 원하는 건 없지만 부족한 건 여기 스케치북에 써놓을 정도로 잘 알고 있고, 그만큼 많이 있는 것 같은데요.”
혜미는 분노하며 외쳤다.
“말하려는데 그쪽이 먼저 내 말 끊었잖아요!”
영영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게 약속할 때 쓰는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거기서 새끼손가락만 피는 손짓을 혜미에게 보이며 느긋하게 말했다.
“안 끊을게요. 약속.”
혜미는 일부러 저런다는 생각에 약이 많이 올랐지만, 한숨으로 무마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품은 좋은데 손님이 없다는 건 손님들이 매력을 느낄만한 구실이 없다는 건데, 결국 이게 무엇을 말하느냐? 딱 봐도 가게 운영이 문제라는 거죠. 인테리어, 그리고 마케팅 등, 현대적인 부분이 과거 전통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과거 전통에 치우친 것으로 명료화 할 수 있어요. 여기가 박물관은 아니잖아요. 아시겠어요? 그리고 분위기를 살리려면 제대로 하던가요! 특히 저 방 세 개중 하나는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해도 칙칙한 데다가 너무 탁 막혀 있고 테이블과 의지가 즐비한 홀에 나와 있어도 분위기가 전통적인 엄숙함은 커녕 남루하기 짝이 없거든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진 그가 체념하듯 물었다.
“예, 알았어요. 흥분 좀 가라앉히고. 근데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이해 안 가는데 정말 대가 없이 하는 거 맞아요?”
“그렇다니까요. 속고만 사셨나. 사실 여긴 내 승리욕을 자극하는 곳이거든요. 영영 씨와의 대화에서 여긴 망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당분간 많이 도와 드릴게요.”
혜미는 알바 갈 시간이라며 나머지 물품들은 한구석에 몰아 놓고 가방에다가 원래 가져왔던 물건들을 넣은 후 영영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날마다 와서 바꿔 놓을게요. 그쪽은 점점, 그러나 순식간에 놀라게 되겠죠.”
“알바 늦으시겠네요. 빨리 가 봐요.”
영영은 미소를 지으며 혜미를 배웅하고는 한숨을 쉬며 달라진 가게 안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속삭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영영은 푸념들을 혼자 털어놓은 뒤, 카운터에서 쪽지를 꺼내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언제나처럼 가게를 정리하고 잠에 빠져 들었다.
'Tea(Main story) > 본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4. 우리집 일호점과 얽힌 서로 -1 (3) | 2015.05.25 |
|---|---|
| 3. 아량이 필요해 -3 (2) | 2015.03.21 |
| 3. 아량이 필요해 -1 (1) | 2014.11.29 |
| 2. 달빛 방문 (1) | 2014.11.04 |
| 1. 그 남자네 찻집 (6) | 2014.10.3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