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변함없이 햇귀[각주:1]가 유리창을 지나 영영의 얼굴을 비치자, 슬며시 눈을 뜬 영영이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갑자기 잠들어서 끄지 못한 노트북의 화면에는 포털사이트 메일이 성공적으로 보내졌다는 알림창이 떠 있었고 주변에는 찻잔과 자양강장제 포장이 된 무수한 유리병들이 서적들과 함께 주변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영은 혹시 침이라도 흘렸나 잤던 자리를 살피고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은 후, 스킨과 로션을 바르며 겉모습을 단정히 하였다.
그리고 나서 주변을 살피며 젯소등 특이한 냄새가 나지 않게 환기가 잘 되었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안심이 안 됬는지 주변마다 방향제를 잔뜩 뿌린 다음, 눈에 인공눈물을 넣어 촉촉하게 적시고 다시 환기가 되게끔 가게 문을 크게 열어 고정시키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쏟아지는 햇빛을 온 몸으로 느끼며 몸에서 돋아나는 생기와 함께 현관문의 팻말 문구를 OPEN으로 바꿔 놓으려던 영영은 문구가 기존의 ‘CLOSE’ 대신 귀여운 글씨체의 ’PREPARATION(준비)’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는 처음에는 놀랐다가 눈치를 채고는 미소를 지으며 팻말을 OPEN으로 바꾸고 찻잔과 유리병 같은 어젯밤의 잔해 처리와 설거지, 재고 확인 등 영업 준비를 서둘렀다.
주변 거리를 걸어가던 대학생들이 뭔가 달라진 모습에 흘깃 바라보면서도 접근할 엄두가 안 나 지나가 버리는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던 그는 ‘그러면 그렇지, 남의 가게에서 이게 무슨 허튼 짓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약이든 약속이든 한 말은 끝까지 이행하는 성격이라 냉장고에 들어있던 떡을 꺼내 먹으며 차에 대한 고서(古書)나 효능을 외우고 거울을 보며 타인에게 좋은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연습했다.
그렇게 연습에 한창일 때 혜미가 여행용 가방을 끌고 가게로 들어오면서 말을 걸었다.
“뭐하세요?”
그가 연습에 열중하며 말했다.
“부탁한 거 연습하고 있잖아요.”
그 말에 웃음보가 터진 혜미를 영영이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자, 혜미는 웃음으로 인해 나온 눈물을 닦고 자체적으로 진정해가며 말했다.
“앜크으킄킄 엌흨흪, 아옼흙 아오, 참. 죄송해요. 시크하고 퉁명스럽게 대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네요. 저도 지지 않도록 새벽에 남는 시간을 겨우 쪼개서 만든 것이 있죠.”
영영은 딱 봐도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한 혜미가 가방에서 꺼낸 어떤 코팅용지 뭉치들을 보고서 물었다.
“이번엔 또 뭐죠.”
“여러 가지 도구들이랑 어제 보내주신 차에 대한 정보들, 제가 인터넷 사전들까지 다 동원해 가면서 차 하나하나마다 효능들을 강조시킨 파일들을 인쇄해 기포 안 생기도록 노력해서 아주 잘 코팅해놨죠. 자, 이제 잘 보이는 곳에다가 붙여요. 대신 절대 다닥다닥 붙여놓진 마요. 오히려 정보과잉에 복잡해보여서 부담스러워 지니까.”
영영은 혜미가 준 뭉치들과 테이프를 받고 같이 붙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이제 반박하지 않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하게 된 자기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지만 이미 그는 그녀의 근거 없는 일방적인 믿음과 행동력에 그러려니 하는 수동적 태도로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몇십 분을 들여 식탁, 벽, 유리 벽 일부 등 한방차 하나하나 마다 정보와 효능이 적힌 A4용지 코팅지가 계절과 제철에 맞게 분류되어 가게 안과 밖 주변에도 자리를 잡게 되었고 주변을 돌며 제대로 되었는지 살펴보던 그가 말했다.
“코팅하는데 돈 좀 들었을 텐데, 이건 샀던거 영수증 주면 그대로 돌려줄게요. 그나저나 이게 진짜 효과는 있어요? 난잡하지 않나.”
영영에게 건네받은 테이프를 가방에 넣던 혜미는 미소를 지으면서 응수했다.
“괜찮아요. 영수증 버려달라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자기 가게에 마케팅 부분을 투자 안 하는 주인에 대한 일종의 자선활동인데요. 뭐.”
그 말에 영영도 역시 또 그 소리냐는 말투와 실망하는 표정으로 화답했다.
“아, 진짜 그런 말 좀 안 들을 수 없나요!”
“생각해봐요. 내가 저번에도 이야기했을 텐데요? 적어도 손님이 가게에 무슨 차가 있고, 자신에게 어떤 차가 맞는지 또 안 맞는지 알아야 할 거 아네요. 또 어느 차의 재료가 제철인지도요. 어제 모과차가 변비라든지 심장질환이 있는 분들에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드시지 말아야 하지만 아저씨가 말해주는 것 외에는 그런 정보가 가게 어디에도 없는데, 아저씨가 깜빡해서 설명 못할 수도 있는거고 또 그런 분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서 모과차를 사서 드신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건 소비자의 알 권리 침해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저는!”
영영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말빨이 셀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리 있네요.”
“중요한 점은 효능 강조에요. 최대한 가게가 손님들의 건강을 책임지려 한다는 이미지를 보여야 하고, 영영 씨도 세일즈맨이나 홍보원이 판촉 하듯이 막무가내로 하는게 아니라 정말 정통하고 신뢰할수 있는 이 분야에는 주름잡는 '전문가'로서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손님들이 더 신용하고 관심을 가지며 제발로 찾아오게 된다고요. 특히, 저와 같은 대학생들에게는 노화방지 같은 피부미용 효과, 학업과 관련되어 머리를 맑게 해주거나 피로회복 효능 등, 사람들에게 맞게 크게 '걱정'하고 관심 가지는 부분들을 조금만 건드려주고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가격과 신뢰성만 잘 쌓인다면 소비자 측은 맹목적으로 찾게 되죠. 화장품 시장과 학업, 업무 관련 건강보조식품 시장이 얼마나 크고 커지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요. 또 그 '원료'와 '건강'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지도요.”
영영이 그건 그런 것 같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혜미가 묘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어 제 연습하라고 부탁한 걸 다행히도 연습하고 계셨네요. 오늘부터 제가 손님들이 많아지도록 도와준다 해도, 그쪽이 무감각한 태도면 별로 효과가 없는데 그래도 가게에 대한 애정은 있나 봐요? 그럼 열심히 하셔서 오늘 오후에 제가 주선할 실전에 꼭 써먹으셔야 해요.”
영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멍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실전이라뇨. 이봐요. 그쪽은 왜 나랑 상의도 없이 자꾸 일을 벌여요? 난 소비자는 아니더라도 판매자의 입장이고 판매자도 알 권리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난.”
그러자 혜미는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몇 시간 뒤면 알 텐데, 무슨! 연습이나 잘해놔요. 나 1시에 수업 들어가야 해요. 그 전에 빠르게 끝내야 하는 것도 있고 말이에요.”
영영은 나가려는 혜미에게 물었다.
“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혹시라도 나 도와주는 것 때문에 밤 샌 거예요?”
혜미는 슬픈 건지 웃는 건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톤으로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그나저나 이제 저 방 3개를 손보면 마무리가 되겠네요. "
그리고는 골칫거리들이 가득하다 못해 빡친 표정으로 주면을 한번 돌아보더니 나가면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건물을 설계 했길래 이다지도 골치 아프게 만든데요? 일단 저건 저녁에 보기로 하고 수업 가볼테니 있다 봐요.”
그는 그녀가 나간 후에도 종소리를 울리는 현관문을 바라보면서 뭔가 의아한 느낌에 혼잣말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수업 끝나고 다시 온단 소리 아냐.”
하지만 무슨 생각이 있어서 저러겠지라는 편한 마음으로 책임감 있게 거울을 보며 손님들에게 전해준 차에 대한 정보와 대화기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 뒤, 어깨에 도면 통을 걸치고 한 손에는 공구박스, 다른 손에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질질 끌며 가게를 방문한 혜미의 모습을 보고 기겁한 영영이 말했다.
“피난 왔어요? 모습이 참......”
“필요한 도구 좀 가져왔어요. 작업해야죠.”
태연히 대답하며 들고 온 것들을 작업할 방 안에 던져놓는 혜미를 보며 영영은 생각을 그만두면서 말했다.
“참 상상을 초월하는 여자예요. 손님은.”
"그럼요. 아오, 목이 좀 마르네. 여기 물 좀 주세요."
영영이 가만히 있자 혜미는 놀리는가 싶어서 영영을 보챘다.
"뭐예요. 여긴 카페라는 곳이 물도 안 줘요!"
그러자 영영은 피식거리면서 한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물은 카페 어느 곳이든 셀프예요."
혜미는 영영이 가리킨 물통이 컵들과 같이 쟁반 위에 배치되어있는 쓰레기통과 연동된 넓은 컵 수거대를 보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그가 웃을까봐 겉으로 아랑곳 하지 않는 척하며 스스로 물을 따라 마신 뒤, 영영에게 일부로 짜증을 내면서 찻집이니까 좀 큰 주전자에 차가운 보리차나 결명자차같은 티백으로도 친숙한 차를 배치해 놓는게 전통찻집으로서의 이미지에 걸맞을 것 같다고 제안하고는 자신이 가져온 여행용 가방에서 몇 개의 책들과 벽지를 바를 때 쓰는 풀들과 젯소, 아크릴 물감과 같은 미술 도구를 꺼내고 도면 통에서 도화지를 꺼내 책을 펼쳐보며 이것저것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영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뭐해요?”
혜미는 대답 대신 참고해서 보고 있던 책을 건네주었고 책을 살펴보던 그가 책들에 담긴 사진들을 보며 신기해하면서 말했다.
“조선 시대의 집에 대한 책이잖아요. 이걸 왜?”
“일단 각 방을 조선 시대의 규방이나 사랑방 컨셉으로 잡을 거예요. 이 방들을 어떻게 써볼까 생각해봤는데 이 방을 다 같이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거나 공부할 수 있는 방으로 꾸미고 길면 3시간 정도 있을 수 있게 하면서 자리를 제공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영영이 그동안 창고로 쓰던 방들에 쌓아둔 재고들과 혜미가 펼쳐놓은 공구들을 훑어본 뒤, 들고 있던 책을 응시하며 몇 장을 더 넘겨본 후에 말했다.
“진심이에요?”
“네. 어차피 창고로 쓰기엔 두 방은 많잖아요. 이 방도 처음 와서 보니까 디자인도 별로긴 한데, 장판도 깔려있고 뭐 보일러도 돌아갈 거 아네요?"
영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미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다행이네요. 난방 안 되면 전기장판이라도 깔려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이 방이라는 것 자체가 뭔가 다른 주변 카페와는 달리 특별함이 있잖아요. 벽면에 붙여져 있는 다도에 대한 설명처럼 전통 차 문화 분위기와 비슷한 여인들이 썼던 규방이나 손님들이 쓰던 사랑채처럼 꾸며서 더 특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처럼 좀 더 전통문화와 결합해서 다른 카페들이 차에 대한 메뉴는 베낄 수 있을지라도 쉽게 베낄 수 없는 이 집만의 분위기이자 가치를 만드는 거죠. 반응 좋으면 길게 3시간까지 있을 수 있게 잡으면 되겠네요. 대학교 근처라 주변 대학생들이 조별과제 토론할 때 상에 빙 둘러앉아 차 마시면서 회의도 가능하고 사교도 하고 다과도 먹고 차도 마시고 얼마나 훈훈하고 좋은 분위기겠어요.”
영영이 그저 혜미를 뚜렷이 쳐다보자 혜미는 뭐하냐는 듯 눈치를 주며 말했다.
“뭐하세요? 창고로 썼던 방들에 있던 짐들 다 빼세요.”
어 떻게든 되겠지 싶었던 영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한 방으로 가서 재고가 담긴 바구니나 상자를 밖으로 꺼내 창고로 쓰던 한쪽 방에 몰아넣고 빈방의 지저분한 것들은 다 치워버리면서 지금은 필요 없는 것들을 분리수거 한 후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치운 곳은 깔끔하게 청소했다.
이것저것 책을 참고하면서 도화지에 그려보며 궁리하면서 자료를 만들던 헤미는 가게 앞에 차가 지나가다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반가워하면서 하던 걸 멈추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마찬가지로 차 소리를 들은 영영이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보자 혜미가 트럭의 짐칸에서 무언가를 꺼낸 후에 짐칸 문을 잠그고 운전석에 있던 어떤 아저씨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야, 혜미야. 네가 말한 대로 가져왔는데, 괜찮은 거냐?”
그러자 혜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살펴보던 아저씨는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디가 학생이니 학생 모습이 더 보기 좋네, 열심히 사는 거 아니까, 학생 때 공부 열심히 해, 보아하니 일하는 거 같은데 빌려준 공구는 안 쓰는 거니까 천천히 돌려줘도 되고.”
“아저씨, 어쩜 좋아. 항상 과분할 정도로 신경써주셔서 감사드려요.”
“감사는 무슨, 일할 때 도움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그리고 학기 시작했는데 뭔 일이여!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공부! 일은 방학 때만 하는 거여!”
아저씨의 어설픈 표정과 본심 없는 호통에 혜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이번만 봐주세요. 히.”
안쓰러운 표정으로 혜미를 잠깐 쳐다본 아저씨는 혜미처럼 미소 지으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건 뒤, 손을 들며 액셀을 밟았고 혜미도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영영은 혜미 옆으로 조용히 다다가 물었다.
“저 분은 누구세요?
“일할 때 같이 알게 된 아저씨예요. 도움 좀 많이 받았는데, 개업하셨더라고요. 필요한 물품도 있어서 주문 좀 했어요.”
혜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커다란 벽지 여러 개를 살펴본 영영이 당황하며 물었다.
“혹시 이것들 그쪽이 산 건가요?”
“네.”
굳어있는 영영의 표정을 살펴본 혜미는 괜찮다는 듯이 영영의 허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치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이것들 다 하얀색이거든요. 저 그림 잘 그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괜찮지 않은 영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계속 쳐다보자 살짝 무안해진 혜미는 벽지들을 하나씩 주섬주섬 방안으로 옮겼고 영영도 잠깐 지켜보다가 같이 벽지를 옮겼다.
잠시 후, 도면 통에서 계속 말린 도화지들을 꺼내 온갖 선과 그림이 뒤섞인 깜지를 만들며 몇 십분을 골치 아파하던 혜미가 어느 정도 완성된 계획도를 보여주자 그가 기다란 도면 통의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하며 이젠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미는 정말 알아서 다 하며 방안의 모습들을 전부 사진을 찍어 자료로 남기거나 능숙하게 안에 있던 가구들을 벽 쪽에서 땐 후에 여행용 가방에서 커터칼을 꺼내서 기존에 붙여진 이음새에 칼질하며 빠른 속도로 벽지를 뜯기 시작했고 알면 알수록 참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든 영영은 자신도 카운터에서 커터칼을 찾은 다음 창고로 쓰던 다른 방의 벽지를 뜯었다.
그 렇게 벽지를 다 뜯은 후, 도배용 풀을 준비하고 벽지의 포장지를 풀어 넓게 펼쳐놓은 혜미가 벽에 구멍이나 곰팡이 등 하자가 없는지 살피고서 도배를 하기 시작했고 그는 뜯은 벽지들을 원래는 창고에 박아두었던 마대자루들을 잡동사니를 놔뒀던 구석에서 꺼내와 전부 구겨 넣어 담고 묶어서 주변에 놔두었고 땀을 흘렸을 때 좋은 당귀를 달인 물에 얼음을 넣어서 컵을 쟁반에 담아 일하고 있는 혜미에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자 작업을 그만두고 가지고 온 물건들도 전부 방에 던져둔 혜미가 원래 이 부분이 며칠 걸린다면서 내일 찾아뵙겠다고 인사하고 가게 밖을 나서자 영영이 저녁이라도 미리 사줄 걸 하는 후회를 하며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음 날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찾아온 그녀가 벽지를 바르고 남는 시간에 자신이 도화지에 그린 도면을 여러 책을 펼쳐 보면서 여기저기 수정할 부분을 찾아내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
시간이 흐르자 깔끔하게 재고 정리를 끝낸 영영은 혜미에 대해서 내심 측은해진 마음에 근처 빵집에서 빵을, 약국에서 자양 강장제를 사와 혜미가 의식하지 않게끔 작업하는 방에다 조심히 두고 일에 열중해 있는 그녀를 흘깃 살펴보며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일부러 기분을 풀어주려고 분위기상 틀지 않던 음악도 틀어놓았다.
“저기! 죄송한데 음악 잔잔한 분위기의 곡으로 바꿔주세요.” 곧바로 혜미의 반응이 왔다.
영영은 멋쩍였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오랫동안 군데군데 먼지가 슬도록 제 기능 하지 못하던 앰프들이 흥겨운 비트에서 부드러운 음색을 풀어헤칠 수 있도록 설정한 다음, 유통기한이 지난 재료를 처리하고 여기저기를 청소도구들로 주변을 청소하면서 차에 대한 서적을 읽으며 공부를 했다. 그리고 현지에서 가져올 재료들을 점검해 농장에 전화를 걸어 방문 일자를 잡는 등, 손님은 아예 없지만 인테리어에 고심하는 혜미처럼 바쁜 하루를 보냈고 저녁이 되자 돌아갈 준비를 하는 혜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을 걸었다.
“오늘 하루 고생했어요.”
“괜찮아요. 벽지도 내일이면 다 붙이고 기존에 붙어 있던 것들도 내일이나 이틀정도면 완전히 마를 거니까요. 문제는 그 이후에 할 것들이 문제인데, 어떻게든 되겠죠.”
“땀도 많이 흘렸는데 시간도 늦었는데 저녁 먹어야죠.”
“괜찮아요. 지금 땀 많이 흘려서 씻어야 하니까 집에 갈래요. 암ㄴ..아니, 땀 냄새날 것 같아 찝찝해요.”
혜미가 부끄러운 듯 황급히 돌아서며 가버리자 그는 살짝 무안해져서 옆에 있던 차 추출기의 ‘청랑’ 상표 마크를 만지작거렸다.
휴일인 다음 날 새벽, 부족한 재고를 현지에서 사오기 위해 어두운 계열의 청록색 코트를 입고 뜨거운 입김으로 손을 비비면서 차 열쇠를 돌려 시동을 걸고 지방에 내려간 영영이 미리 연락을 주었던 각 농장을 돌면서 상태를 직접 점검한 싱싱한 차 재료들을 박스대로 차에 싣고서 전부 현찰로 계산하고 오후 늦게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지는 석양이 차 유리창에 비치며 운전하는 영영의 그림자를 길게 만들고 주변의 차들도 시간만큼이나 빠르게 흘러가자 영영은 슬슬 떨어지는 연료 게이지를 흘깃 보면서 자신이 기름 값은 남겨두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바람을 가르는 차들의 소리를 깨는 벨 소리가 울리자 영영이 모르는 번호임을 확인하고 스팸일지도 모르니 나중에 받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계속 운전대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전화는 받지 않음에도 끊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같은 번호로 두 통 더 오다가 문자가 하나 오자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영영은 톨게이트를 지난 뒤 한 손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커피 모양의 아이콘 하나와 함께 <문 언제 열어요? (*`Д′)/ >라고 된 문자를 본 영영이 누가 보냈는지 두뇌 뉴런들의 전기적 신호와 기억 중추 해마의 순간적인 콜라보레이션으로 알아차린 후,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는 문자를 보내곤 액셀을 밟았다.
마지막 휴게소에서 주유를 마친 후 계산할 때 직원이 서비스로 건네준 믹스 커피를 거절하고 유자차를 받아든 영영은 차를 잠깐 식힐 겸 주차하고 스멀스멀 저물어가는 하루의 마지막 햇빛을 받아 붉은빛으로 마지막 빛을 발하는 바깥 도로의 들판 옆에 서서 유자차를 다 마실 때까지 잠깐 구경하고는 다시 가게를 항해 차를 몰았다.
한 시간이 더 지나서 동네로 도착한 영영이 구름이 많이 낀 밤하늘을 보며 가게 앞에 차를 정차시키고 내리자 가게 문 앞에 혜미가 토라진 표정과 함께 스스로 팔짱을 끼며 다가와 물었다.
“조금 늦었네요?”
“왜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 장사 안 한다고 분명 붙여 놓았는데.”
영영이 현관문에 CLOSE라고 놔둔 팻말과 함께 붙여진 종이를 가리키자 혜미는 다소 삐진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손님이 아니니까요! 지금 여기 뜯어고치는 게 누군데요! 저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온 거라 재료비를 포함해 귀한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고요. 조금 있으면 아르바이트도 갈 시간이라 기껏 왔더니 정말!”
그가 열심히 말하는 혜미를 외면하고 차 트렁크를 열어 재고 박스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네, 그쪽 말은 대충 알겠는데 일단 막 가져온 재고 집어넣어야 하니 일 좀 하고 잠시만 있다가 더 자세히 이야기합시다.”
영영이 박스를 문 앞에 놔두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조명을 다 키면서 박스가 있던 문 앞을 향해 돌아서자 박스를 들고 들어선 혜미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거 어디다 두면 돼요?”
든 박스를 들썩이는 혜미에게 창고에 넣어달라고 주문한 영영은 혜미와 같이 차에서 재고들을 모두 옮긴 후, 박스들을 개봉해 위생 장갑을 끼고 하나하나 예상 유통기한을 표시하고 포장하거나 빈 차 재료 통에 넣는 작업을 마무리했고 혜미는 방으로 들어가서 작업을 진행하고 시간이 되자마자 영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허겁지겁 짐을 챙겨 돌아갔다.
그로부터 이틀에 걸쳐서 나머지 방까지 도배가 끝나자 혜미는 작업한 방들을 살펴보면서 영영에게 말했다.
“대충 다 끝났네요. 생각보다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서 오래 걸렸지 뭐에요. 워낙 제가 다방면으로 할 일이 많아서야 말이죠. 이해해주실 수 있죠?”
영영이 대답대신 끓인 물에 달인 차를 종이컵에 담아 컵 홀더를 씌워 건네주면서 말했다.
“고생했는데 마시면서 몸 좀 따뜻하게 하세요.”
“뭘요, 더 고생할 게 많은데요. 잘 마실게요. 자판기 아저씨.” 혜미가 불편한지 컵홀더를 빼고서 종이컵을 받아들며 말했다.
“한동안 안하더니 다시 자판기라고 말하네요.”
영영이 별로 탐탁지 않은 말투로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설거지를 하자 혜미는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아저씨 아이덴티티에 그런 태도는 섭하지 않아요?"
"아이덴티티는 무슨!!"
세제 거품이 사방에 튈 만큼 버럭하며 과한 리액션을 보이는 영영을 보고 깔깔거리던 혜미는 종이컵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카페인데 종이컵으로 주셨네요."
"아, 드릴 생각만 하다보니, 찻잔 설거지 다 하고 찻잔으로 드릴 걸 그랬네요."
겸연쩍어 하는 영영에게 혜미가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네요. 전 종이컵도 좋아요. 싸고 흔하지만 친근하고 차가 품은 따스한 온기가 얇은 종이 사이로 손의 체온과 교감도 되고, 무엇보다 아무리 구겨지고 접혀도 다시 펴서 제 역할과 가치를 다 하잖아요. 상처같은 자국이야 남겠지만."
묵묵히 설거지를 하며 듣는 영영에게 혜미가 영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종이컵에 주니 아저씨가 진짜 자판기 같잖아요. 푸히힛!"
"아이 진짜!! 방심하다 당했네!! 그만 좀 놀려먹어요!!"
발끈거리는 그의 팔을 툭 치면서 뭘 그런걸 가지고 그러냐며 익살스럽게 굴던 혜미가 분위기를 전환할 겸, 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차 향도 좋네요. 이 방면은 문외한이지만 향이 구수한게 잘 다려진 거 같아요.”
“가루차에요. 불발효차인 잎차와 가루차는 한번 개봉하면 되도록 단시일 내에 마시는 것이 좋아서 막 개봉한 걸로 들였어요.”
“아, 그렇구나. 오래 놔두면 커피가 산화되는 것처럼 맛이 변하나 봐요?”
“정확히 말하면 가루차는 변질이 빨라요. 종류와 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반발효차는 변질이 가루차보단 덜하죠. 예외로 후발효차인 보이차나 천량차 종류는 오래될수록 향이 좋아요.”
혜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 내음을 깊게 들이키면서 물었다.
“차를 언제 개봉했길래 그러세요?”
“아, 별건 아니에요. 올해 첫물차를 말차로 만든 게 괜찮은 상태로 남아 있어서요.”
영영은 혜미의 표정이 언짢은 표정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으며 말을 이었다.
"이거 일일이 설명하자면 긴데 괜찮겠어요?"
"이 때까지 다 들었는데요, 뭘. 잘 들고 있으니 말씀해 보세요."
“그러니까 첫물차는 4월 초순에서 5월 초순에 딴 차를 우리나라에서 부르던 용어에요. 우전이라고도 하죠. 그다음 5월 말부터 6월까지는 두물차로 세작이라고 하고 7월부터 8월경에는 세물차로 중작, 네 번째로 8월 하순에 나오는 차가 끝물차로 대작이라고도 하는데 품질 상으론 첫 번째로 따는 첫물차가 제일 좋죠. 그 뒤로 갈수록 품질도 가격도 저렴해지고요. 첫물차일 때는 감칠맛 성분인 아미노산류가 많이 함유되어있고 차의 유명한 성분이자 쓴맛을 내는 카테킨 성분이 적어요. 그리고 가루차를 말차라고 해요. 헷갈리시지 않게 가루차로 정정해서 설명하면 찻잎을 증기로 쪄서 건조해 가루를 내는 방법으로 비타민A, 토코페롤, 섬유질 등 찻잎 성분을 마실 수 있는 장점이 있죠. 단점은 이미 말했고요.”
혜미는 청산유슈인 영영의 말에 감탄하면서도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차를 음미하면서 말했다.
“아직 차를 많이 안 마셔봐서 명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설명을 들으니 최고로 좋은 차라는 거겠네요. 저에게 대접을 이렇게 융숭하게 하실 필요는 없으신데,”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이런 찻잎을 이용한 가공 방법을 제다법이라고 해서 만드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 잎차, 홍차, 우롱차로도 나뉘며 시루나 가마솥, 열탕을 이용하거나, 지금에 와서는 고압용 보일러를 사용해 차를 100도 정도의 고압 수증기로 짧은 시간에 익혀내 산화효소를 파괴하는 작업을 하죠. 에.. 그니까 덖음차 방식과 마찬가지로 냉각함으로서 차의 색깔과 향을 보존하며 수분을 줄이고 열처리를 한 다음, 가볍게 비비는 조유(粗揉)과정을 거쳐요. 그걸 약 15분간 찻잎을 가볍게 비비며 압축하는 유념(揉捻)작업 까지 마치고서 재빨리 이른 시간 안에 건조하여 일차적으로 완성한 황차를 수분이 그 반 퍼센트가 되도록 밀폐해 저온실에 놔두면 비로소 완성되는 증제차 방법이 있어요, 이 방법이 녹색 그대로의 카테킨 성분이 가장 많이 함유되죠.”
영영은 숨을 한 번 들이킨 다음에 기억을 계속 더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생각났다! 그러니까 어린 차 싹을 비비고 부드럽게 해서 가마솥에서 덖어 만든 구수한 맛이 일품인 우리 고유의 전통차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찻잎이 참새의 혀를 닮았다 하여 작설차(雀舌茶)라고도 하는 덖음차도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한 거예요. 옥로차도 있긴 한데 그건 일본에서 불리고 개발된 거죠.”
“대체 어디에서 부담을 가지지 말라는 말인지 모르겠네요. 증제차 설명이 너무 장황하신 거 같은데 요약은 어렵나요?”
영영이 난처한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 잠깐 생각을 하다 말했다.
“기억을 최대한 돌이키며 생각나는대로 말하는 것도 힘든데 요약이라니.. 어휴, 어디 보자, 음 그러니까 증제차는 살아있는 차를 따는 생다 작업, 그다음에 찌는 증엽, 식히는 냉각, 조유와 유념 작업, 건조하면서 잎의 모양을 내는 정유, 그리고 건조, 수분과 관련된 직업인 재건(再乾), 찻잎을 골라내는 선별, 그리고 마지막 포장 작업을 거친다고 볼 수 있어요.”